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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부정공>학생공휘윤석묘표(學生公諱潤錫墓表)
學生公諱潤錫墓表 維我玉川趙氏中葉自生員晩樂公相宅于仙湖以後蕃衍雲仍不能容一閭漸次傍溢分門立戶所在擅雄且各挾其能一切圖進取故凡校院場屋間峩峩頭巾境內他族莫有先焉大抵歷世豪强其來久矣其中若宗兄諱潤錫公深惟素分牧謙養耻戢風調而飭躬乎家庭因地利而盡力乎耕稼以順母和兄弟爲事豈漢時所稱孝悌力田之科者非耶竊念寅錫生雖晩幸及幷世而居差涯角平日所聞知見知但與校院場屋峨峨頭巾己熟至於公隱居行義乃讀其狀而始識於是憮然曰徵此幾乎相失於宗黨知內令人作責沈之文耳按公容儀端而髭髯美性度潔而涇渭正應接之際未嘗出非情之言受非義之物干非類之人其廉介自少己然恫早違慈願亦謹事庶母惟晨夕承歡旣專久於尊府志體之養靡不用極而侍癠餌血猶屬疏節居憂情文備至每夫日哭位聲淚俱作常患大宅力絀畫二斗土爲置祭田盖割饘粥所資也人皆難之適同隣鄭妹子偶有少詰者沉死事誣衊撗生至煩官司禍將棘矣公悶其無力可解使之全家避仇其在功戚究門逃蹤勢所難免是以見逮于拕半載賴時侯嚴公世永之閱實事得寢而薄産之削亦以此終無怨悔噫人之謹掘與剛果未嘗非水火然君子不滯一隅苟義所可不以利害險夷爲之趨避故所謂謹掘不是懦弱剛果非全好勇則以公雍容能毅然行爲甥脫禍者豈常情所忖度哉天資如彼之美而貧不充學固可恨臨終惓惓以敎迪後進爲末命之首宜爾公字乃遊 純祖甲戌 高宗甲申生卒也月嶝面業峙技穴幽宅也先系己哉譜而生員公第二子 贈參判泰鼎系統制公后是生五衛將斗臣是生永溥又無嗣嗣本生再從兄永澤字秉常公往父諱在鎬慶州鄭相龜女考若妣也配延日鄭氏晴莎沼后忠煥女生先公一年且後四年以沒葬喂養洞辛原所擧者二男淇運有志行女歸咸豊李敦五孫男樂模女二曰仲憲泳李壻子曾孫東善東昱東曜幼女二適人樂模方此用夷燮夏之日留心學問晩而不懈飭諸子方劬書其進未涯公之餘澤抑不斬矣乎嗚呼余豈不朽人哉今不辭顯刻之請者若粗效文字薄技得相是役則庶可少伸疇昔失拜之情兼使後之過此墓者知我舊國昭代亦有遺隱云 宗弟 寅錫 謹撰 학생공휘윤석묘표(學生公諱潤錫墓表) 생각하건대 우리 옥천 조씨는 중엽(中葉)에 생원 만락공(晚樂公)이 선호(仙湖)에 터를 가려 산 이후로 번성한 자손이 한 마을에 살수 없어 곁으로넘쳐 문호를 세워거처가 웅대하고 또 각기 능한 바에 따라 진휘하여 향교 서원 과장 사이에 웅위(雄偉)한 인물이 경내에 다른 씨족을 압도하였다。 대저 역대 호족으로 지난 근원이 깊은데 그 가운데 종형(宗兄) 휘 윤석공 같은 이의 성품을 깊히 생각하니 겸양(謙讓)을 위주로 염치(廉恥)를 기르고 지취를 따라 몸을 가정에서 닦고 지리에 의하여 힘을 농사 짓기에 다하며 부모께 순종하고 형제 화합을 일삼으니 한 나라때 일컬은 바 효제역전(孝悌力田)의 과(科)가 아니 겠는가。 사사로이 생각하니 인석(寅錫)이 비록 만생(晚生)이나 다행히 한 시대로 주거의 상거가 멀어 평일에 듣고 본바는 다만 교원장옥(校院場屋)의 높은 인물이라고 이미 익숙하게 들었고 공이 숨어살며 의리를 행한 것은 이제 그 장문을 읽고 비로소 알았다。 그래서 망연히 실심하여 말하기를 「이것이 아니면 거의 서로 족내간 영명한 자를 잃고 글을 틀리게 쓸번 하였다」 하였다。 살피건데 공은 용모가 단정하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성도가 조출하여 청탁이 바르고 응접할 때에 일찍 비정한 말을 내지 아니하고 의리에 어긋난 물건을 받지 아니하며 사람을 가려서 사귀며 젊어서부터 청렴 결백하였다。 모친이 일찍 돌아가심을 슬퍼하여 공경히 서모를 섬기며 오직 주야로 기쁘게 해드리고 부친 지체 봉양함을 정성스럽게 하며 병환이 나시자 안색과 형용이 초췌하고 초상이 나서는 정과 예가 함께 지극하였고 매양 날로 영위에 곡할 때는 곡소리와 눈물을 함께 흘렸다。 항상 큰댁이 힘이 부족함을 근심하여 제사 위토 두 마지기를 바친 것은 대개 죽으로 연명하면서 장만한 것이어서 사람들이 모두 어려운 일이라 하였다。 마침 이웃에 사는 정씨 누이의 아들이 우연히 조금 남과 다툰 일로 무고를 당해 그 화로 장차 갇히게 되었다。 공이 힘 없음을 근심하여 그집 전부를 피난 시켰다가 반년 뒤에 당시 수령 엄 세영(嚴世永)공의 밝은 판결을 힘입어 무사히 해결되었으며 마침내 원한과 후회가 없게 되었다。 아! 사람의 사가고 엄전한 것이 굳세고 과단한 것으로 더불어 일찍 상극이 되었으나 군자가 한 모퉁이에 머물지 않는 것은 진실로 의리가 옳으면 이해와 헙의가 뒤따르다고 해서 피할 바 아니다。 이른바 삼가고 엄전한 것은 나약한 것이 아니요、 굳세고 과단한 것도 온전히 용맹을 좋아한 것이 아니다。 공이 옹용하고 의연한 자세로 생질을 위하여 화를 피하게 한 것은 어찌 보통 심정으로 헤아릴 바인가。 하늘에서 받은 자질이 저와 같이 아름다운데 가난하여 학문을 못 배운 것이 진실로 한스러우나 운명할 때까지 거듭거듭 후생을 교도한 것이 일생 사업이었다。 공의 자는 내유(乃遊)요 순조(純祖) 갑술년(一八一四)과 고종(高宗) 갑신년(一八八四)년이 그 생졸연대이며 월등면 업치 계혈(癸穴)이 유택이다。 선계는 이미 보첩에 실렸고 생원공 둘째아들 증참판 태정(泰鼎)이 통제공 후사로 출계하여 오위장 두신(斗臣)을 낳고 이분이 낳은 영부(永溥)가 또 아들이 없어 본생 재종형 영택(永澤)의 아들 병상(秉常)으로 후사를 삼았다。 이분이 낳은 휘 재호(在鎬)와 경주 정상귀(鄭相龜)의 딸이 공의 고와 비이다。 부인 연일정씨(廷日鄭氏)는 청사 정소 공의 후예 충환(忠煥)의 딸로 一년 먼저 출생하여 四년 뒤에 별세하니 외양동(喂養洞) 신좌 언덕에 안장하였다。 아들 기운(淇運)은 지행이 있고 딸은 함풍(咸豊) 이 돈오(李敦五)에게 출가하고、 손자는 낙모(樂模)요 증손은 동선(東善)·동욱(東昱)·동요(東曜)이다。 낙모가 오늘날 처럼 말세에 학문에 마음을 두고 늦게까지 부지런하며 여러 자제를 신칙하여 바야흐로 글을 힘쓰게 하여 그 진취가 가이 없으니 공의 여택이 또한 끊기지 아니 하였다 하겠다。 아! 나 또한 어찌 영원히 살 사람이겠는가。 이제 현각의 청을 사절아니 한 것은 대략아니마 문자를 배워 엷은 기예지만 이 일을 맡아서 전일에 다하지 못한 정을 펴고 아울러 후일 이 묘소를 지나는 자로 하여금 옛우리 나라 밝은 세대에도 유은(遺)군자가 있었음을 알게 하고자 함이다。 종제(宗弟) 인석(寅錫)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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